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바오로 2세 (문단 편집) === 반공과 민주화 === 사실 추기경 시절에는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와 폴란드 공산정권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교황]]으로 선출될 때에는 폴란드 신자들이 인질로 잡혀 교황이 휘둘리지나 않을까 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우려가 있었고, 특히 [[영국]]은 무례에 가까울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어떤 신문에서는 '[[콘클라베]]가 아니라 초등학교 반장 선거 같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을 정도. 당시 [[이탈리아]]에 대한 칼럼을 쓰던 [[시오노 나나미]]는 [[영국]]의 이러한 반응을 인용해서 "[[가톨릭교회]]가 공산 진영에 대해 카드를 잘못 뽑았다"고 디스했다. 참고로 [[요한 바오로 1세]]의 선출에 대해서는 '보수파의 얼굴마담'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현재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 동유럽 혁명|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군사력 경쟁이나 경제 제재 등 위협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신앙심에 바탕을 둔 용기와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평화적으로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했다. 과거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프랑스]]와의 국교 수립을 위해 협상하던 중, 프랑스 측의 [[피에르 라발]]에게 "교황이 거느린 사단이 몇 개나 되느냐?"(다시 말해 "변변한 군사력도 없는 교황이 뭐가 대단하다는 거냐?"며 무시한 것)고 말했던 적도 있기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의 역할은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공동대응을 주문하던 [[바티칸]]과 몹시 불편한 사이였다. 이는 [[서유럽]] 및 [[미국]]과의 국교를 수립하여 다시 국제사회에 진출하려는 스탈린에게 몹시 큰 장애물이었고, 특히 [[프랑스]] 등 [[가톨릭]]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있어서 더욱 그랬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외교관계의 개선을 위해 일시적으로 종교 박해를 중단하고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미국과의 국교 수립 후 더 이상 바티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자 대대적으로 교회를 파괴하고 고위 성직자들을 처형했다. 스탈린의 종교 박해는 독소전쟁이 발발된 후에야 중지되었다. 1978년 10월 [[폴란드]] 출신의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Karol Józef Wojtyła·요한 바오로 2세의 본명) [[추기경]]의 [[교황]] 선출 당시 [[소련]]의 2인자이자 4년 후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유리 안드로포프]] KGB 의장은 체제에 대한 위협을 직감했다. 안드로포프는 즉각 폴란드에 있는 [[KGB]] 책임자에게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의 주민이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방임했는가”라고 물었다. 이어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교황으로 인해 소련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 뒤 KGB에 대해 "폴란드 출신 인물이 교황에 선출된 이유를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KGB]]는 며칠 뒤 "[[폴란드인]]이 교황으로 선출된 배후에는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가 주도하고 [[미국]]과 [[서독]]이 합작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KGB는 "이 음모는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해체를 의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KGB의 분석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확인했다. 또한 "[[미국]]의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이, [[폴란드]] 출신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이 되도록 일을 꾸몄다"는 분석도 당시의 KGB로서는 의심할 만한 대목이었다. 브레진스키는 1977년 1월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백악관에 들어가기 직전인 1976년 폴란드의 보이티와 추기경이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연설한 적이 있다. 당시 브레진스키는 보이티와 추기경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보이티와 추기경을 티 파티에 초대했다. (브레진스키도 폴란드 출신이다.) 두 사람은 모국어인 [[폴란드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두 사람의 친분 관계는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이 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그러나 브레진스키가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이 되도록 콘클라베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다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미국 카터 행정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의 고위 [[외교관]] 출신으로 카터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 관료를 지낸 제임스 렌츨러는 1998년 10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보낸 기고에서 “[[폴란드인]]이 교황이 된 데 감동한 카터 대통령이, 냉전의 전개 방향을 뒤바꿀 만한 정책을 주도했다”고 회고했다. 그 중의 하나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최측근으로 ‘성직자 옷을 입은 키신저’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바티칸 국무장관과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사이에 구축된 이른바 ‘[[바티칸]] 핫라인’이다. 이 핫라인을 통해 요한 바오로 2세와 독실한 [[침례회]] 신자인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사이에는 중요한 정책토론이나 의견 교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렌츨러는 "두 지도자가 군비축소, 인권, 기아구제, 당시 [[동유럽]]에서의 민중 소요사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의 잔학행위, [[중국]]에서의 [[가톨릭]] 박해, [[아프리카]]에서의 [[쿠바]]의 모험주의적인 행동, 중동 평화, 테러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털어놓았다. 렌츨러는 양측이 모두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원칙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양측의 일치되는 견해에서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행동이 나왔으며, 이러한 행동들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확실하게 지켰는지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교황이 1979년 6월, 폭군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의 학정을 꾸짖다가 순교한 성 스타니슬라오 순교 900주년을 기념해 조국인 [[폴란드]]를 방문한 것을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서곡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조국 방문을 ‘순례’라고 표현하며 공산독재에 신음하는 동포에게 “당신들은 인간이다. 존엄성을 갖고 있다. 땅에 배를 깔고 기어다니지 말라.”는 유명한 메시지를 낭독했다. 교황의 [[폴란드]] 방문을 우려하던 당시의 공산정권은, 하필이면 왕에게 저항하다가 순교한 성 스타니슬라오의 순교 기념일에 맞춰 교황이 방문하는 것부터 의도적인 행보라고 판단하였지만, 차마 교황의 방문을 거절할수는 없어 교황이 폴란드 공산정권 수립 35주년, 나치 독일 침공 40주년을 기념해서 방문하는 것으로 방문 목적을 조작하기까지 했으며 전국의 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교황은 우리의 적이다. 그는 모두에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입맞춤하고 사람들 모두와 악수를 나누는 등, 군중에 친숙한 행동을 한다.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을 보고 하는 짓이다. 우리는 청소년을 [[무신론자]]로 만드는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허용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를 방문한 9일 동안 [[바르샤바]], [[크라쿠프]] 등 대도시를 돌며 수백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가는 곳마다 “신념을 잃지말라, 패배하지 말라, 용기를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거듭 전달했다. 폴란드는 물론 소련 공산당조차도 교황의 영향력에 기절초풍했고 브레즈네프, 그로미코, 안드로포프 등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극도의 우려를 표명했다. 그로미코는 테헤란에서 호메이니나 벌일 수 있던 일이 바르샤바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전부터 가톨릭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안드로포프는 교황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폴란드 국민의 대부분은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교황의 조국 폴란드 방문은 [[폴란드인]]의 신앙심을 감동시키는 것이기도 했지만, 애국심과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의식을 움트게 하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후 폴란드의 성직자들은 노동자나 지식인의 공산정권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해나갔다. 결국 다음 해인 1980년 8월 폴란드는 동구권에서는 최초의 독자적인 노동조합인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를 쟁취했다.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솔리다르노시치는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미 폴란드 가톨릭은 1956년 오하프 정권을 무너뜨리고 고무우카를 선출시킬 정도로 사회주의권 종교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1970년에도 고무우카 정권을 무너뜨려서 기에레크 정권에 이르면 공산당이 가톨릭 눈치를 살피는 정도였다. 브레즈네프는 이꼴이 날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의 입국을 금지하라고 요구했지만 기에레크는 폴란드인 교황의 입국을 거부했다간 정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소련 서기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후 교황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입증되었고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중부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까지 덩달아서 들썩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리스도인 신자 수가 격감해서 동독의 경우에는 공산정권을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의 수가 3분의 1 이하로 줄어들던 반면, 폴란드에선 신자들이 오히려 더 증가하여 1980년대 후반에는 [[미사]]의 정기적 참례율이 70%를 찍고, 정권의 설문조사에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답변하는 사람이 5%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교세를 자랑하게 된다. 그외에도 요한 바오로 2세는 체코슬로바키아 방문을 타진하였는데 폴란드 계엄령 사태에 맞물려서 실현되진 못했다. 또 가톨릭, 이슬람을 가리지 않고 탄압하던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 정권에 날을 세우며 격렬히 비판하고 레이건 행정부와 관련해서 긴밀히 협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